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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2층집이 사라진 이유, 온돌 때문일까?Insight 2025. 7. 14. 20:42반응형
동양과 서양은 시작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렵과 유목을 지나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흑백의 시대를 지나 색이 입혀진 그림이 등장한다.
신을 그리던 시기에서 인간의 일상을 담는 풍속화로 넘어가는 흐름도 비슷하다.
시대만 다를 뿐, 흐름 자체는 많이 닮아 있다.그런데 건축만은 완전히 다르다.
서양은 도시든 시골이든 2층, 3층 집이 기본이다.
일본 역시 2층짜리 목조 가옥이 어렵지 않게 눈에 띈다.
그런데 한국의 전통 가옥은 대부분 단층이다.
지붕을 얹은 낮은 집, 바닥에 바짝 붙어 사는 구조가 오래도록 이어진다. 왜 그랬을까?고려시대만 해도 2층짜리 누각이나 다락방이 있었는데,
조선으로 오면서 그런 구조는 거의 사라진다.
단순히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던 걸까?조선 중후기로 가면서 집 구조에는 눈에 띄는 변화가 생긴다.
그리고 그 중심엔 ‘온돌’이 있다.
소빙하기가 바꾼 조선의 주거 구조
17세기 후반, 조선은 극심한 기후 이상을 겪는다. 지금으로 치면 ‘기후 재난’ 수준의 혹한기였고, 역사에서는 이를 ‘소빙하기’라고 부른다. 기온이 평년보다 낮게 유지되면서 봄에 파종한 곡식이 싹도 틔우지 못한 채 얼어 죽었고, 여름에는 햇볕이 부족해 벼가 제대로 익지 못했다. 이로 인해 1670년 경신대기근, 1695년 을병대기근 같은 대규모 흉년이 반복되었고, 수많은 백성이 굶주림에 시달리며 목숨을 잃는다.
기근은 단순한 식량 문제만이 아니었다. 겨울이 길어지고 날씨가 추워질수록 살아남기 위해서는 난방이 필수가 된다. 이전까지 일부 지역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되던 온돌이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도 그 때문이다. 그저 불을 피워 방 한구석을 데우는 것이 아니라, 바닥 전체에 열을 전달해 따뜻함을 오래 유지하는 방식이 필요했다. 그 요구를 충족시킨 것이 바로 온돌이었다.
온돌은 단순한 난방 기술이 아니었다. 그 구조 자체가 주거의 형태를 바꾸기 시작한다. 불을 지피는 아궁이, 열기를 전달하는 구들장, 연기가 빠져나가는 연도 등 일련의 구조는 단층으로 설계되어야만 효율이 좋았다. 따뜻한 바닥을 중심으로 삶이 조직되었고, 방은 작아지고 천장은 낮아졌으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바닥 가까이에서 생활하게 된다. 결국 조선의 집은 따뜻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수평적으로 넓어지고, 수직으로는 낮아지는 방향으로 진화하게 된다.
이처럼 소빙하기라는 거대한 자연 변화는 단지 농업 생산성이나 인구 구조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 그 기본 단위인 ‘집’의 모습까지 근본적으로 뒤흔든 것이다. 온돌은 조선의 건축 양식을 설명하는 기술이자,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생존 방식이었다.
온돌은 공간을 평평하게 만든다
온돌은 단순한 난방 방식이 아니라, 주거 구조를 결정짓는 중요한 기술이었다.
온돌의 구조는 단층에 매우 적합하다.
불을 지펴 아궁이에서 나온 열이 바닥 아래를 지나가야 하고, 그 열을 머금은 구들장이 방 전체를 데우는 방식이다.
즉, 바닥 전체가 하나의 열 전달 장치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2층 구조는 난방 효율이 매우 떨어진다.
2층까지 열이 도달하지 않기 때문에, 위층은 춥고 아래층만 따뜻한 비효율적인 구조가 된다.
결국 사람들은 실용성을 위해 2층을 포기하고 단층 구조를 선택하게 된다.온돌을 설치하려면 불을 지피는 아궁이, 열을 머금는 구들장, 연기를 빠져나가게 하는 연도까지 일정한 구조가 필요하다.
이 구조는 단층에서만 효율적으로 작동하며, 설비 공간 확보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층을 쌓는 데 불리하다.
온돌방은 기본적으로 불을 중심에 두고, 사람의 생활이 바닥 가까이로 밀착되게 만든다.
앉고, 눕고, 자고, 먹는 일상이 모두 바닥 중심으로 짜여지면서 '앉는 문화'와 '바닥 중심 생활'이라는 특유의 주거방식이 자리잡게 된다.게다가 온돌은 바닥은 데우지만 공기 전체를 따뜻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따라서 열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방을 작고 낮게 설계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한옥이 방이 작고, 천장이 낮으며, 복잡한 구조 없이 수평으로만 퍼져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옥의 수평성은 미학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구조의 결과였다.
땔감은 산을 민둥산으로 만들었다
온돌의 확산은 에너지 소비 구조에도 큰 변화를 일으킨다.
모든 열원의 중심이 나무 땔감이었기 때문에, 난방 수요가 늘어날수록 산림 자원은 급속히 고갈된다.이는 지금도 확인 할수 있는게, 북한을 보면 벌먹을 하고, 채집을 해서, 대분의 산이 민둥산이라고 한다.
조선도 같아서, 대부분이 민둥산이라고, 조선 후기에 온 선교사들이 찍은 사진이나 그림을 보면, 많은 수로 민둥산을 그린것을 확인 할수있다.
지방 관아는 금산령을 내려 무분별한 벌목을 막으려 했고, 식목령으로 나무를 심으라고 독려했지만 실효성이 없었다.
겨울이 추워지면 당장 필요한 건 법이 아니라 불을 땔 나무였고, 사람들은 결국 나무뿌리까지 캐서 태우는 지경에 이른다.그 결과 전국의 산은 민둥산으로 변해갔다.
식생이 사라진 산은 비가 오면 흙이 쓸려 내려가 산사태와 홍수 같은 2차 재해로 이어졌고, 토사는 논밭을 덮어 식량 문제로 다시 연결된다.
온돌은 사람을 따뜻하게 했지만, 동시에 산을 병들게 했던 양면의 기술이었다.목재 자원이 부족해지자 제대로 된 집을 지을 재목도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휘어진 나무나 가느다란 나무로 급하게 집을 짓게 되었고, 그 결과 안정성보다 생존을 위한 최소 구조가 우선되었다.
점차 한옥은 작고 단순한 형태로 고정되었고, 디자인은 단조로워지고 기능 중심으로 변해간다.
이는 ‘전통’이라기보다, 자원이 줄어드는 시대의 건축적 타협에 가까웠다.
고려에 있었던 2층집, 왜 조선엔 안 보일까?
고려시대에는 2층 건축물이 엄연히 존재했다.
상류층의 다락방이나 절에 있는 누각, 군사 목적의 망루 등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이러한 수직 구조의 건축물은 민간에서 자취를 감춘다.그 가장 큰 이유는 온돌의 구조가 2층 건물과 공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온돌은 1층 바닥 전체를 구들로 덮는 구조다 보니, 그 위에 방을 하나 더 얹는 건 공간과 구조 양쪽 모두에서 비효율적이다.
아궁이도, 굴뚝도, 연도도 모두 1층 기준으로 설계되기 때문에 2층에까지 열이 도달하지 않으며, 구조적으로도 취약해진다.결국 생존과 효율을 중시한 조선 사회는 단층 중심의 구조로 자연스럽게 고정되었다.
이는 시대의 퇴보가 아니라, 당시 기술과 자원의 현실에 맞춘 선택이었다.
‘왜 한국은 2층집이 없을까’라는 질문은, 단순한 문화적 차이가 아니라 기술과 구조, 기후와 환경이 함께 만든 결과물이었다.
현대 온돌은 전혀 다른 시스템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온돌은 과거의 구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시스템이다.
현대식 온돌은 '바닥에 열을 전도시킨다'는 철학은 같지만, 그 방식과 구조는 완전히 바뀌었다.
보일러와 배관을 통해 온수가 바닥 전체를 순환하며, 전도된 열이 공간 전체를 데우는 시스템이다.20세기 초, 미국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일본 체류 중에 한국식 온돌방을 경험하고 큰 영감을 받는다.
그는 이를 기반으로 현대식 라디언트 히팅 시스템을 고안했고, 이후 유럽과 북미에서도 온돌 방식이 유사하게 발전하게 된다.현대 온돌은 석유, 가스, 전기 같은 연료와 단열 기술이 결합되어 열 효율이 크게 향상되었다.
더 이상 나무를 태우지 않기 때문에 산림 파괴와 연기 문제도 사라졌고, 주택 구조 역시 단층에 제한되지 않게 되었다.
결국 현대의 온돌은 전통의 철학을 살리면서도, 기술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셈이다.온돌은 훌륭했지만, 조선은 기술을 넘어서지 못했다
조선의 온돌은 단연코 훌륭한 발명이다.
혹한의 기후 속에서도 바닥을 따뜻하게 유지하는 방식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수준의 열전달 기술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그 기술을 확장시키지 못했다.
온돌은 끝내 2층까지 데울 수 있는 구조로 발전하지 못했고, 단층에서 멈췄다.
문제는 기술 그 자체보다도, 기술을 대하는 태도에 있었다.조선은 유교적 관료 중심 사회였고, 실용 기술은 언제나 글보다 아래에 두는 문화 속에 있었다.
기술자는 낮은 신분의 장인으로 취급되었고, 구조를 새롭게 바꾸는 시도는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런 사회에서 온돌을 기반으로 2층까지 열을 전달하는 기술이 나올 리 없었다.
결국 조선의 집은 기술적 한계가 아니라, 기술을 얕본 결과로 단층에 갇힌 것이다.다른 나라들은 비효율적인 난방이라도 건축 구조의 유연성을 우선시했다.
서양은 벽난로를, 일본은 국부 난방을 통해 2층, 3층까지 구조를 자연스럽게 진화시켜갔다.
하지만 조선은 바닥은 따뜻했을지 몰라도, 공간은 한없이 낮고 좁아졌다.
이것이 온돌의 한계가 아니라, 조선 사회의 선택이 만들어낸 구조적 결말이었다.기술이 멈춘 게 아니라, 기술을 멈추게 한 사회가 문제였다.
온돌은 조선의 자랑이지만, 동시에 조선이 넘지 못한 경계이기도 했다.반응형'Insight'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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