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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어떻게 고대의 영토를 알 수 있을까?
    Insight 2025. 6. 24.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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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영토는 왜 그렇게 보이는가?

    어릴 적 역사책을 펼치면, 언제나 지도가 먼저 나왔다. 고구려는 만주까지 넓게 퍼져 있었고, 로마 제국은 지중해 전체를 감싸듯 영토가 표시되어 있었다. 경계선은 색으로 또렷하게 나뉘어 있었고, 뭔가 지금의 국경처럼 당연하게 여겨졌다.

    나중에 TV에서 로마 시대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로마 제국의 최대 영토’라는 지도가 또 나온다. 그걸 보면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2천 년 전에 누가 그 경계를 정했지? 그 당시엔 지도도 없었을 텐데?” 그때부터 궁금해졌다. 우리가 보는 고대의 영토는 대체 어떤 기준으로 정해진 것일까?

    삼국시대든, 로마 제국이든, 그 시절엔 위성도 없었고, 땅을 정확히 측량할 기술도 없었다. 행정구역도 지금처럼 정밀하게 나뉘어 있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여기까지가 고구려였다”, “여기까지 로마였다”고 말한다.

    그 경계선은 정답이 아니라, ‘당시 권력이 닿았던 범위’를 근거로 학자들이 복원해낸 역사적 추정에 가깝다. 그리고 그 방식은 한국이든 유럽이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하다.

     

    영토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였을까?

     

    고대 국가들은 지금처럼 땅을 정확히 측량하거나, 국경을 조약으로 확정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누구 땅이었는지’를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대신 우리는 그 국가가 실제로 어떤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를 보고 그 경계를 추정한다.

    이때 사용하는 자료는 대부분 기록, 유물, 지명, 언어 흔적, 외교 문서 등이다. 삼국시대의 경우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 《수서》 같은 기록에 등장하는 전쟁이나 외교, 성곽 건설 기록들이 그 근거가 된다. 예를 들어, “고구려가 백제의 한강 유역을 점령했다”는 문장이 있다면, 그 시기 한강은 고구려의 영토로 표시되는 것이다.

    이 방식은 로마 제국에서도 똑같이 쓰인다. 로마는 속주 단위로 정복지를 관리했고, 어느 지역에 군단을 주둔시켰는지, 어느 지역에서 세금을 거뒀는지 등의 문서를 남겼다. 이 기록들을 바탕으로 학자들은 '로마의 통치력이 닿은 범위'를 복원하고, 오늘날의 지도 위에 색칠하게 된다.


    기록이 없는 지역은 흔적이 말해준다

    예를 들어, 위의 사진인 터키의 지역에서 로마양식의 유적이 있을때, 로마의 영향권에 있다로 시작해서 분석에 들어갈 수있다. 그래서 직접 통치지역이었는지 영향만 받았는지 등등 관련 서적등을 통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기록이 남은 지역은 그래도 복원이 쉬운 편이다. 하지만 문제는 기록이 없는 지역이다. 이때는 유적과 유물이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고구려 양식의 무덤, 신라식 기와, 백제의 금동대향로 같은 유물이 발견된 곳은, 그 국가의 문화권이 닿았던 지역으로 간주된다. 비슷하게, 로마 양식의 도로, 공중목욕탕, 수도시설이 있는 지역은 로마화가 이루어진 곳으로 본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유물이 발견됐다는 사실보다, 같은 시기에 같은 양식의 것이 다수 발견되었는가이다. 이런 유적의 분포는 단순한 무역이나 영향력의 흔적을 넘어, 문화적 또는 행정적 지배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실질적인 증거로 간주된다.

     

    물론 이 역시 단정할 수는 없다. 로마식 화장실이나 목욕탕 구조가 좋다고 여긴 바이킹 부족이 이를 모방해 지었다면, 그건 로마 문화의 영향이지, 로마의 영토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결국 유물은 그 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고 차용했는지를 보여주지만, 그 자체가 정치적 지배의 증거인지는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유물 하나만 보지 않고, 유형의 반복, 분포 지역, 시대적 일치 같은 여러 조건을 함께 고려한다. 영토 복원은 단순한 발굴이 아니라, 해석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명은 시간을 견디는 흔적이다

     

    문서와 유물이 불완전하더라도, 지명은 수백 년을 넘는 단서를 제공한다. 삼국시대의 수도였던 국내성은 오늘날 중국 지안 지역에 있다. 백제의 사비성은 지금의 부여, 신라의 서라벌은 경주로 남아 있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파리는 본래 루테티아(Lutetia)라는 로마식 도시였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나 영국의 런던도 로마 시대부터 같은 지리적 이름이 이어져 왔다. 지명은 침략이 바뀌고 언어가 바뀌어도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지도 위에 표시된 도시 이름을 분석해, 과거의 통치 중심지를 유추할 수 있다.


    외교와 조공의 흔적도 지도 위에 새겨진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와 어떤 외교 관계를 맺었는지도, 그 나라의 영향력 범위를 보여주는 요소다. 삼국시대엔 중국, 일본과의 외교 문서나 조공 기록이 남아 있고,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는 ‘고려 국왕’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런 문장은 당시 국가가 자국의 위상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보여주며, 그 말을 받아들인 주변국의 인식도 함께 담겨 있다.

    로마 제국 역시 국경 너머의 게르만 부족이나 파르티아와 교섭하고, 그들에게 조공을 받거나 속국으로 편입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지도에는 이처럼 ‘사실상 통제했지만 직접 통치하지 않은 지역’까지 포함되기도 한다.


    지도 위 경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런 모든 요소들을 종합하면, 오늘날 우리가 보는 고대의 영토 지도는 하나의 역사적 복원 작업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그 선 하나에는 수많은 기록, 유적, 언어, 해석이 뒤섞여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경계가 단지 땅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문화가 오갔고, 어디에 권력이 머물렀는가를 묻는 과정이다.

    우리가 지금 보는 그 지도가 정답은 아니다. 하지만 수많은 학자들이 쌓아온 질문과 탐색의 흔적이라는 점에서, 가장 인간적인 지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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